정치인

이석현 : 제19대 후반기 국회부의장, 그에 대해 알아보자.

blogout 2025. 6. 30.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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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현은 2남 1녀 중 장남으로, 이리북일국민학교, 이리동중학교, 남성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이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진학했으나 중퇴하고,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서 법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학문에 대한 열정으로 고려대학교 정책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한국항공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73년 4월 24일부터 1975년 12월 30일까지 대한민국 육군 상병으로 만기 전역했습니다. 그의 종교는 가톨릭이며, 세례명은 임마누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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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현은 민주화추진협의회 창설기획위원을 시작으로 김대중 총재 비서, 평화민주당 부대변인, 민주당 정책위원 등을 역임하며 정치 경력을 쌓았습니다. 제14대 국회의원(경기 안양시 을)으로 처음 국회에 입성한 이후, 제15대, 17대, 18대, 19대, 20대 국회의원을 지내며 총 6선 의원의 경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는 새정치국민회의와 새천년민주당에서 정책조정위원장을 맡았고, 국민의 정부 시절에는 환경관리공단 이사장을 역임하며 환경 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이석현

국회에서는 제17대 국회 전반기 보건복지위원회 위원장, 국민연금제도개선특별위원회 위원장, 제18대 국회 전반기 저출산고령화대책특별위원회 위원장 등 중요한 직책을 수행했습니다. 또한 민주당 정치개혁특별위원장, 전당대회 의장, 제19대 국회 전반기 남북관계 및 교류협력발전특별위원회 위원장 등 당내 주요 보직과 특위 위원장을 역임하며 폭넓은 활동을 펼쳤습니다. 제19대 국회 후반기에는 국회부의장을 지냈으며, 문재인 정부에서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을 역임했습니다. 최근에는 새로운미래 창당준비위원장, 고문, 비상대책위원장과 새미래민주당 상임고문을 맡으며 정치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석현의 성장과 민주화 운동의 여정

 

이석현은 1951년 3월 16일 전북 익산에서 2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도 면의원을 지낸 아버지의 기대를 발판 삼아 학업에 매진했습니다. 학창 시절 내내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고, 중학교 입학 당시 장학금을 위해 노력했던 경험은 그에게 끈기를 심어주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한시를 공부하며 뛰어난 한자 실력을 갖추었고, 문학에 대한 관심으로 동화책을 출판하기도 했습니다.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입학했으나 법학과로 반수하여 사회과학연구회와 가톨릭학생회 활동을 통해 운동권에 발을 들였습니다. 지하신문 '횃불'을 발행하고 교련 반대 운동에 참여하는 등 활발히 활동했으며, 징집 거부로 기소되기도 했으나 은사의 도움으로 선고유예와 함께 군에 입대하여 1975년 상병으로 만기 전역했습니다. 이 군 생활은 훗날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되는 것을 막아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잠시 보험회사에서 일하며 안정된 삶을 살았지만, 동료들의 설득으로 다시 운동권 활동을 병행했습니다. 1980년 민주연합청년동지회(연청회)창립에 참여하여 시국사건에 연루되기도 했고, 보안사에서 고문을 당했으나 구속은 면했습니다. 이후 민주화 운동의 길에 완전히 투신하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고 민주화 추진 협의회(민추협)창립에 참여하며 본격적인 민주화 투사로 활동했습니다. 이 시기 수입 없이 선배들의 용돈으로 생활하는 등 어려운 시기를 보냈습니다.

정치 입문과 국회의원으로서의 발자취

 

이석현의 정치 인생은 1985년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인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요청으로 사회 각 분야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하여 제출한 후 그의 비서로 채용되어 3년간 근무했습니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 평화민주당 후보로 출마하며 정치 무대에 공식적으로 등장했습니다. 비록 낙선했지만 높은 득표율을 기록하며 평화민주당 부대변인이 되는 등 당내 주요 직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꾸준한 지역구 관리를 통해 지지율을 높인 그는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경기 안양시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며 국회에 입성했습니다. 이후 제15대, 17대, 18대, 19대, 20대 국회의원을 역임하며 6선 의원이라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국회에서는 보건복지위원회 위원장, 저출산고령화대책특별위원회 위원장등 주요 상임위원회 위원장을 지냈습니다. 또한 민주당 정치개혁특별위원장, 전당대회 의장등 당내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제19대 국회 후반기에는 국회부의장을 역임하며 국회 운영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문재인 정부에서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으로 위촉되기도 했습니다.

 

주요 의정 활동, 논란, 그리고 최근 행보

 

이석현은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당시 국회부의장으로서 능숙하고 단호한 의사진행으로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여당 의원들의 고성을 막고, 의제와 관련 없는 발언에 대해 단호히 대처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의장직을 걸고 말하건대 관계가 있습니다. 퇴장시키기 전에 들어가세요!'와 같은 명언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또한 정청래 의원의 필리버스터 중 화장실 이용을 허용하며 '소변 안 보고 연설하느냐, 소변 보고 연설하느냐는 진실하고는 아무 관계 없는 껍데기입니다'라는 유머러스하면서도 핵심적인 발언으로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의 정치 경력에는 여러 논란도 있었습니다. 1997년 해외용 명함에 '韓國(南朝鮮)'이라고 표기한 것이 명함 파문으로 불리며 북풍 공작의 일환으로 활용되기도 했습니다. 2015년에는 종교인 과세에 대한 발언으로 종교 편향 논란을 빚었고, 천안함 피격 사건관련 음모론을 제기했다는 비판도 받았습니다. 2022년 이태원 사고 희생자 명단 공개를 주장하며 유가족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습니다.

2020년 제21대 총선경선에서 탈락했지만, 정계를 완전히 은퇴하지 않고 꾸준히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2021년 문재인 정부에서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을 역임한 후, 2023년 이낙연 전 대표를 지지하며 더불어민주당을 탈당하고 새로운미래창당에 참여했습니다. 2024년 제22대 총선에 서울 강북구 을 선거구로 출마했으나 지역 연고 부재 등으로 낙선했습니다. 2025년 5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새미래민주당을 탈당했으나, 6월 더불어민주당 복당 심사에서 불허 통보를 받았습니다.

 

이석현은 미혼으로, 젊은 시절 민주화 운동에 헌신하며 결혼을 포기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동안 외모로 유명하며, 우리나라 헌정 사상 미혼 남성으로는 최다선 의원, 국회부의장, 최고령 국회의원이라는 기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2009년 이명박 대통령의 떡볶이집 방문을 비판했다가 국무총리실로부터 사찰을 당했던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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