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철호는 법조인에서 정치인으로 변신하여 대한민국 울산광역시의 중요한 인물로 자리매김한 인물이다. 1949년 부산에서 태어난 송철호는 부산고등학교와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변호사로서 경력을 쌓았다. 이후 현대중공업노동조합과 현대자동차노동조합의 고문변호사를 맡으며, 노동 문제에 깊이 개입하면서 울산에서의 입지를 굳혔다. 또한 울산노동법률상담소 소장, 울산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장, 울산YMCA 이사장 등으로 활동하면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며 지역사회에 기여했다. 이러한 경험은 그의 정치적 여정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송철호는 정치인으로서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그는 민주당과 열린우리당에서 울산시 중구 지구당 위원장으로 활동하며 지역 정치를 이끌었고, 그 후 제7대 국민고충처리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이직 후 2018년에는 울산광역시장에 당선되어 민선 7기로 임기를 시작했다. 울산시청에서의 그의 정치적 경로는 지역 발전과 균형 잡힌 사회를 이루기 위한 그의 철학을 바탕으로 한 행보였다. 특히, 울산시민축구단 구단주로서 지역 스포츠 발전에 기여하며 지역 주민들과의 소통을 강화하는 한편, 울산시의 경제적 발전을 위한 다양한 정책들을 추진했다.
송철호는 울산을 발전시키기 위해 정치적, 사회적 역할을 강화하며 울산의 비전을 제시해왔다. 울산광역시장으로서의 재임 기간 동안 그는 울산의 산업 발전뿐만 아니라, 환경, 교육, 복지 등 다양한 분야에서 균형 있는 발전을 추구했다. 또한, 대통령직속 국가균형발전위원회 고문으로서 지방 균형 발전을 위한 정책 제안에도 참여하며, 정치인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그의 지도력은 울산 시민들에게 깊은 신뢰를 얻었으며, 이러한 신뢰는 그가 울산을 이끄는 데 중요한 원동력이 되었다.
송철호는 대한민국의 변호사 출신 정치인으로, 제7대 울산광역시장을 지낸 인물이다. 그는 정치적 생애의 대부분을 울산광역시에서 보내며, 울산 지역을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했다. 그와 함께 울산을 비롯한 부산, 경남 지역에서 활동하던 노무현, 문재인 전 대통령과 함께 부울경 지역의 인권 변호사 3인방 중 한 명으로 불리며, 그들의 정치적 입지에도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송철호의 정치적 여정은 1992년 14대 총선에서 울산에 처음 출마한 이후, 2018년까지 총선과 지방선거 등 여러 차례의 선거에서 도전과 실패를 반복하면서도 끊임없이 도전하며 결국 울산광역시장이 되는 결실을 맺게 된다.
1. 송철호 - 출생과 학창시절
송철호는 1949년 5월 26일, 경상남도 부산부 보수정(현 부산광역시 중구 보수동)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은 부산과 익산에서 보냈으며, 부산 보수초등학교를 거쳐 익산 팔봉초등학교와 익산 남성중학교를 졸업했다. 1968년에는 부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에 진학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법조인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으나, 사법시험에 뒤늦게 뛰어들어 1985년에야 부산에서 변호사로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가 문재인 전 대통령보다 법조인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한 시점은 늦었지만, 그만큼 다른 법조인들과의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고 성과를 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2. 변호사로서의 활동과 정치적 입지 형성
송철호는 1987년부터 울산으로 활동 지역을 옮겨, 노동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울산에서 현대자동차와 현대중공업 노조를 위한 법률 활동을 하며, 노동자들의 권익을 대변했다. 이 시기 동안 그는 노동자들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며 인권 변호사로서의 명성을 쌓았다. 또한, 그는 3당 합당에 반대하며 지역구도 타파를 주장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조언을 받아 울산에서 정치에 입문하게 된다.
3. 정치적 도전과 실패
송철호는 1992년 14대 총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울산 중구에 처음 출마했으나 3위로 낙선했다. 이후 1996년 15대 총선에서는 통합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35.7%의 득표율을 기록했지만, 신한국당 후보에게 아쉽게 패배했다. 그의 정치 여정은 이때부터 계속해서 도전과 실패의 연속이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총선과 지방선거에서 도전했지만, 결국 당선되지 못하고 8번의 고배를 마셨다.
4. 지방선거와 정치적 승리
2002년 지방선거에서는 울산 민주노동당과의 후보 단일화 과정을 통해 선출되었지만, 상대 후보의 극단적인 지역주의적인 공격에 의해 석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3년, 참여정부 출범 후 열린우리당 울산시당 창당에 참여하고, 2004년 총선에서 출마하려 했으나 선거법 위반 혐의로 공천을 받지 못했다. 이후 2005년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 의해 국민고충처리위원장에 임명되었고, 2008년에는 다시 총선에서 출마했지만 낙선하였다.
그런 와중에 송철호는 2011년 문재인 전 이사장의 주도 하에 민주통합당으로 복당하며 다시 정치에 복귀한다. 그는 울산에서 제3의 도전이자 6번째 출마를 선언한 뒤, 2014년 지방선거에서도 재도전했지만 여전히 실패했다. 이후 2017년, 더불어민주당에 복당하고 울산시당 인재영입위원장직을 맡아 활동했다. 그와 같은 정치적 행보는 단순한 실패를 넘어, 울산과 부울경 지역의 정치적 환경을 변화시키려는 꾸준한 노력으로 볼 수 있다.
5. 2018년 울산광역시장 선거에서의 승리
2018년, 송철호는 마침내 울산광역시장 선거에 출마하게 된다. 9번째 도전에서 그는 울산광역시장이 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강력한 울산시장 후보로 부상했다. 당시 현직 시장인 김기현 전 시장의 재선 가능성에 대한 여론도 높았으나, 송철호는 진보 진영의 단일 후보로서 출마하게 된다. 2018년 6월 13일,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마침내 울산광역시장으로 당선되었으며, 그의 정치적 경력에서 가장 큰 전환점을 맞이했다.
6. 당선 후의 정치적 활동과 평가
송철호가 울산광역시장이 된 후에는 여러 가지 정치적 과제를 안게 되었다. 취임 직후 그는 박맹우의 측근으로 분류되던 송병기를 정무부시장 겸 경제부시장으로 임명하며 지역 정치에 대한 통합적인 접근을 시도했다. 그러나 송철호는 취임 후에도 여러 조사에서 낮은 직무 수행 평가를 받았다. 2018년부터 2019년까지 그의 직무 수행 평가 지지율은 최하위를 기록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철호는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면서 성과를 이뤄냈다. 태화강 국가정원 지정, 부유식 해상풍력단지 추진, 방사성 폐기물 처리 문제 해결 등 여러 가지 분야에서 중요한 진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태광산업 방폐물 불법 보관 사건을 비롯한 여러 논란이 이어지며 지역 내 여론이 불안정한 상황을 이어갔다.
7. 코로나19 대응 및 향후 과제
2020년, 울산에서 첫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한 이후, 송철호의 시정은 첫 번째 확진자 대응을 비롯한 초기 대응에서 여러 비판을 받았다. 울산시의 행정력 부족이 원인으로 지적되었으나, 이후 코로나19 방역 대응에서는 점차 개선된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도 송철호는 울산의 주요 산업과 지역 경제 회복을 위한 정책들을 추진했다. 자동차 업계 지원을 위한 주52시간제 한시유예 추진 등의 노력은 일정 부분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8. 정치적 입지와 향후 전망
송철호는 2020년 21대 총선에서 울산 지역구 국회의원 6석 중 대부분을 미래통합당이 차지하면서 정치적 입지가 더욱 좁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1년까지 울산에서 주요 프로젝트들을 발표하며 성과를 내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가 받았던 정치적 평가는 여전히 혼란스러웠고, 지역 여론의 불만도 계속해서 제기되었다. 2021년 9월에는 울산 신항에 대규모 오일과 가스를 저장하는 시설을 건립할 계획을 발표하며, 울산의 산업 재도약을 위한 계획을 제시했다.
9. 법적 논란과 향후 전망
2023년 현재 송철호는 법적 논란에 직면해 있으며, 징역형을 구형받았다. 그가 법정에서 어떤 판결을 받을지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고 있으며, 만약 법원이 검찰의 선고를 받아들인다면 부울경 지역의 광역자치단체장들이 모두 법적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진기록을 세울 수 있다.
송철호는 이제 그의 정치적 경력의 마지막을 맞이하는 시점에 있다. 그가 직면한 법적 문제와 함께, 향후 울산광역시의 정치적 변화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