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성(李昊星, Lee Ho-sung)은 1967년 7월 17일 전라남도 순천시에서 태어난 대한민국의 전직 프로 야구 선수입니다. 그는 1990년 해태 타이거즈에 1차 지명으로 입단하였고, 2001년까지 해태와 KIA 타이거즈에서 외야수로 활약했습니다. 신체는 182cm의 키에 80kg의 체중을 가지고 있었으며, 우투우타로 뛰어난 경기력을 자랑했습니다. 또한 2001년에는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광주서석초등학교, 광주충장중학교, 광주제일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연세대학교 신학대학에서 신학 학사 과정을 마쳤습니다. 이후 조선대학교 대학원에서 체육학 석사 과정을 마친 후, 군 복무를 위해 육군 제31보병사단 방위병으로 복무하였습니다. 이호성은 다양한 학문적 배경을 가지고 있었으며, 종교는 개신교였습니다.
불행히도, 이호성은 2008년 3월 10일 서울 서초구 반포동에서 40세의 나이에 사망하였습니다. 그의 죽음은 많은 이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반포대교 남단 인근에서 사망한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운 인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이호성: 야구와 사업을 넘나든 전설적인 외야수
이호성은 대한민국 프로야구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그가 남긴 업적은 단순히 선수로서의 성과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해태 타이거즈의 외야수로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며, 그 외에도 선수협 회장직을 맡으며 선수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노력도 기울였다. 또한 은퇴 후 사업가로서도 성공을 거두며, 다채로운 인생을 살아온 인물이다.
1. 어린 시절과 운동의 시작
1967년, 전라남도 순천에서 태어난 이호성은 광주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그의 가족은 고도로 교육받은 집안으로, 의사나 법조인과 같은 엘리트들이 많았다. 이러한 배경 덕분에 이호성은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하지만 그가 어린 시절부터 야구와 인연을 맺은 것은 우연이 아닌, 체육교사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시절, 이미 운동 신경을 보였던 그는 체육교사의 추천으로 야구를 시작했다. 그러나 고등학교 시절까지는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2. 대학 야구와 해태 타이거즈 입단
이호성의 야구 인생에서 중요한 전환점은 연세대학교 시절에 찾아왔다. 연세대에서 그는 4번 타자로 활약하며 두각을 나타냈고, 4학년 때는 제15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으로 발탁되기도 했다. 이후 1990년, 고향 팀인 해태 타이거즈에 1차 2순위로 지명되었고, 이로써 프로 야구 선수로서의 여정을 시작했다. 그의 등번호는 27번으로, 이는 해태 타이거즈의 원년 홈런왕이자 당시 타격 코치였던 김봉연의 번호였다. 이호성은 김봉연과 같은 번호를 물려받으며 큰 기대를 받았다.
3. 선수 경력: 해태 타이거즈의 핵심 외야수
해태 타이거즈에서 이호성은 빠르게 중심 타선의 중요한 일원으로 자리잡았다. 1990년, 입단 첫 해부터 그는 99경기에 출전해 타율 0.304, 출루율 0.400을 기록하며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1년, 그는 21홈런을 기록하며 OPS 0.887을 기록, 두 번째 해부터 골든글러브 외야수 부문에서 수상하며 실력을 입증했다. 그 당시 그는 20-20 클럽에 가입하며, 호타준족의 상징과 같은 선수가 되었다. 그의 전성기 시절, 1990년대 해태 타이거즈는 한국 시리즈에서 4차례 우승을 차지했는데, 그 모든 우승에서 이호성은 핵심 선수로 활약했다.
1990년대 해태 타이거즈의 중심 타선에서 이호성은 홍현우, 이종범과 함께 주요 타자로서 활약하며, 한국 프로 야구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이호성은 또한 국가대표로도 선발되어, 1991년 한일 슈퍼게임, 1993년 한일 프로친선대회 등 다양한 국제 경기에도 출전했다. 그러나 이호성의 선수 생활은 부상과 함께 왔다. 특히 1991년을 제외한 다른 시즌에서는 풀타임으로 뛰지 못했으며, 1993년, 1995년, 1998년 등은 많은 경기를 결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꾸준히 성적을 남기며 팀에 기여했다.
4. 중반기의 어려움과 재도약
1993년부터 1996년까지는 투고타저 시대였고, 이 시기 이호성의 기록은 다소 저조하게 보였다. 그러나 그는 1997년에 다시 부활했다. 1997년 시즌에는 110경기에 출장하여 타율 0.276, 홈런 15개를 기록하며, OPS 0.799와 wRC+ 126.8을 기록했다. 이는 그가 여전히 팀의 핵심 선수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 후, 2001년까지는 성적이 점차 하락했다.
5. 선수협 회장직과 은퇴
이호성은 2001년 선수협 회장직을 맡으며 선수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싸웠다. 그는 최저 연봉 인상, 복지기금 조성 등 여러 가지 개선 사항을 추진하며 선수협 회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특히 2001년 하반기, 외국인 선수 기용 확대에 반발해 '포스트시즌 보이콧'을 선언하며, 구단과 KBO를 긴장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1년 시즌 종료 후, 이호성은 사실상 은퇴하게 되었다. 구단과의 갈등이 원인이 된 것으로 보이며, 은퇴식 없이 선수 생활을 마감하게 되었다.
6. 은퇴 후의 삶: 사업가로서의 성공
은퇴 후 이호성은 사업가로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여러 사업을 벌이며, 야구 외에도 자신의 역량을 펼쳤다. 그가 어떤 사업을 통해 성공을 거두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의 열정과 추진력은 비즈니스 분야에서도 큰 성과를 가져왔을 것으로 추측된다.
7. 기록과 유산
이호성은 1990년부터 2001년까지 총 1,090경기에 출장하며 통산 타율 0.272, 홈런 102개, 도루 167개를 기록했다. 또한 그는 1990년대 해태 타이거즈의 중요한 일원으로서 팀의 4번의 한국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으며, 그의 기량과 노력이 여전히 팬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그의 통산 WAR(대체선수 대비 승리기여도)은 27.50로 평가되며, 타격과 주루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1992년과 1993년에는 25연속 도루 성공 기록을 세우기도 했으며, 도루 성공률이 매우 높은 선수였다. 이호성은 한 팀의 중심 타자로서 매년 일정한 성적을 유지하며, 해태 타이거즈의 역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 선수였다.